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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드의 노래

  • H.Press
출판
5.64
MB

소장

13,000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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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개

출판사 서평

<머리말>

 

이 노래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최초의 문학작품이다. 대개의 유럽 중세 서사문학이 그렇듯이 작가 미상이며,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다가 1140년경에 처음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가 작가 미상이다 보니 출판되는 책에 따라 제목이 Cantar de mio Cid, Cantar del Cid, Poema de mio Cid, Poema del Cid 등 여러 가지로 나와 있다. 본 번역서는 여러 비평본들 중에서 이 작품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라몬 메넨데스 삐달의 Cantar de mio Cid를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은 이를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우선 mio(나의)라는 단어 때문이다. 원저자는 작품 속에서 이 단어를 무척 자주 쓰고 있다. 본 번역서에서는 이를 친근감 있게 우리 식으로 ‘우리 시드’라고 번역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중세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아마 ‘우리 시드’가 아니었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번역서 제목으로는 ‘우리 시드의 노래’ 대신에 우리에게 더 친숙한 명칭인 ‘엘 시드의 노래’로 택했다. Cid란 ‘님, 주군, 주인’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로 아랍인들이 주인공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에게 붙여준 경칭인데, 스페인 역사상 이것이 고유명사화 되어 불린 사람은 주인공이 유일하다. 따라서 스페인 역사상 ‘시드’ 또는 ‘엘 시드’라고 하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주인공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이 cantar(노래)인지 poema(시)인지의 차이는 이 작품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이다. 즉, 이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노래를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학식 있는 누군가가 창작한 것인지에 대한 관점 차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제목이다. 본 번역서에서는 문학사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민감한 주제를 새삼 끄집어내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며, 단지 메넨데스 삐달의 비평본을 번역한 것이고 또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제목을 고르다 보니 ‘노래’를 제목으로 삼게 된 것이다. 따라서 mio를 친근감 있는 표현으로 삼는 대신 정관사를 고유명사화시키고, 이 작품의 성격을 cantar(노래)에서 출발한 것으로 인정하다보니 제목도 자연히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엘 시드의 노래』로 정하게 되었다.

앞에서 밝힌 바대로 본 번역서는 많은 판본들 중에서 이 작품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라몬 메넨데스 삐달의 작품을 기초로 하고, 번역 시 의문 나는 사항들은 아래의 다른 작품들을 참고했다.

 

Cantar de mio Cid, Texto antiguo de Ramon Menendez Pidal, Madrid: Espasa-Calpe, 1991.

Cantar del Cid, Quito: Libresa, 1991.

Poema de mio Cid, 17ª. ed., Madrid: Catedra, 1991.

Poema de mio Cid, Coleccion “Sepan Cuantos”, v.85, Mexico: Porrua, 1973.

Poema de mio Cid, Colin Smith (ed.), Madrid: Catedra, 1976.

Poema de mio Cid, Edicion, introduccion y notas de Ian Michael, 5ª ed., Madrid: Castalia, 1988.

Poema del Cid, Traduccion de Francisco Lopez Estrada, Madrid: Castalia, 1961.

 

번역 시 느낀 가장 큰 애로는 음절수와 운율을 살리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음절수와 운율은 통일성과 정형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이 노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름대로의 리듬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구현한 것이 운율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이나마 제대로 살릴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먼저 음절수는 원문에서도 각 행마다 큰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다. 10음절에서 20음절까지 다양한데, 대부분은 14∼16음절 정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중간에 쉼이 있어 각 행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번역본에는 각 행의 음절수를 지킬 수 없었으며, 내용 전달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각 부분을 도치시킨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쉼 부분을 원본과 동일하게 할 수만은 없었음도 밝힌다. 더 아쉬운 것은 원문의 운을 살리지 못한 것이다. 이 노래는 시행의 길이도 불규칙하지만 운율 역시 통일되어 있지 않다. 노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 (추방의 노래)에서는 강세 모음만 동운을 이루는 부분동음운(asonancia)이 많이 쓰였다. 그러나 제2부 (결혼의 노래)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차츰 줄어들다가 제3부 (꼬르뻬스 숲 속에서의 모욕)에서는 거의 사라진다. 이러한 경향은 문학사에서 이 노래의 원저자가 1인인지 2인인지 하는 문제와 결부되지만, 번역본에는 이러한 운율의 변화를 제대로 살려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원본의 운율과 리듬감을 번역본에서도 그대로 살릴 수만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문학적 결과를 낳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노래는 총 3730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제1부 맨 앞부분에 약 50행과 제3부의 2338행 앞부분 일부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이 부분들은 메넨데스 삐달의 비평본에서 『20왕 연대기』 등을 토대로 내용이 보충되어 있으며, 본 번역본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중간 중간 굵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메넨데스 삐달이 자신의 비평본에서 원문에는 없는 내용을 보충해 넣은 것이다. 그의 판본에는 이탤릭체로 되어 있으며 행을 셀 때는 제외된다. 본 번역본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으며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굵은 글씨로 표시해 놓았다.

또한 메넨데스 삐달이 원문과는 달리 행을 나누어 놓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원문에는 16행과 16b행이 한 행이었는데 메넨데스 삐달이 이를 두 행으로 나눈 것이고, 본 번역본은 이를 그대로 따랐다. b로 표시되어 있는 행도 역시 행의 숫자를 계산할 때는 제외된다.

이 밖에도 본 본역본에서는 대화부분을 이탤릭체로 표시해 구분을 쉽게 했다.

 

10 고삐를 잡아 채 말을 재촉하시네.

비바르를 떠날 때는 까마귀가 오른쪽에서 날아갔으나,

부르고스를 들어설 때는 왼쪽에서 날아갔다네.

시드께서는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가로저으시네.

-길조로군! 알바르 파녜스, 우린 추방당했지만,

명예롭게 이 까스띠야로 되돌아올 걸세.

 

[3]

 

15 우리의 시드 루이 디아스께서 부르고스에 들어서시네.

그의 곁에는 육십 명의 기병이 함께 있다네.

16b 남녀노소 모두 그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부르고스 인들 모두 창문 너머로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슬퍼한다네.

모두 입을 모아 말하네.

20 -오, 주여, 주군만 제대로 만났더라면 얼마나 훌륭한 신하가 되었을꼬!

 

또한 거의 모든 고유명사 표기는 스페인어로 읽을 때와 동일하게 경음을 사용했으나, ‘베드로’나 ‘야곱’ 등과 같이 우리에게 매우 낯익은 이름들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한글 표기를 그대로 따랐다.

부족한 번역본이나마 세상의 빛을 보게 도와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관계자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스페인 중세 문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널리 읽혀 많은 이들에게 스페인이라는 나라와 그 문학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작품 해설>
1. 작가 및 연대

이 노래는 스페인 중세 때 실존 인물이었던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일명 ‘엘 시드’라는 인물의 무용담을 읊은 무훈시로써, 중세 스페인에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노래와 춤, 재미있거나 슬픈 이야기 등을 들려주고 그 대가로 음식과 돈을 벌던 후글라르(juglar)라 불리던 방랑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던 것이었다. 주인공인 시드가 죽은 것은 1099년이다. 이때부터 누군가에 의해서 그의 무훈을 기리는 노래가 불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차츰 지금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다. 처음 기록된 것이 주인공이 죽은 지 4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1140년이니까, 실제로 당시에는 시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젊은 시절 추방 길에서 함께 노숙을 했거나 그의 휘하에서 모로족을 상대로 한 전투에 참여했던 부하들도 꽤 살아 있었을 것이다. 노래솜씨와 재담, 우스꽝스러운 몸짓이나 엄숙한 표정 등 연기에도 능숙했던 당시의 방랑시인들이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기사의 이 생생하고도 장대한 무용담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아마도 자신이 모시던 후글라르나 다른 동료 후글라르, 또는 시드의 옛 부하들로부터- 이 노래를 귀동냥해 듣고는 암기했다가 자신의 밥벌이 수단으로 활용했을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청중들의 흥미를 배가시키고 시간을 늘리기 위해 노래의 내용을 제멋대로 개작하거나 첨가하기도 했을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입담이 좋은 방랑시인일수록 주인공인 시드를 더 궁지로 몰아넣어 청중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고 어린 두 딸들을 더 불쌍하게 만들어 눈물샘을 한껏 자극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을 단기필마로 통쾌하게 물리치고 자신을 버린 국왕에게 전리품을 보내 충성을 다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과장을 해야만 본인들이 원하는 빵과 포도주가 더 풍성하게 차려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진짜든 아니든, 시드와 함께 싸웠었다는 누군가의 경험담이라도 -이 또한 과장되기 십상이지만-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방랑시인들마다 읊는 내용도 길이도 제 각각이었을 것이다. 이 노래는 이처럼 시드 사후 약 40여 년 동안 제멋대로 진화해 가며 불리던 것을 메디나셀리에 살던 어느 방랑시인이 최초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 판본의 내용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최초 기록자의 단독 작품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구성의 치밀함이나 묘사의 정확성, 표현의 절제성 등 전체적인 작품의 완성도로 보아 그 이전에도 다른 판본들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메넨데스 삐달는 이 노래의 작가를 두 명으로 보고 있다. 한 명은 산 에스떼반 데 고르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방랑시인으로 구전으로만 떠돌던 노래를 1120년경에 기록했으며, 다른 한 명은 메디나셀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방랑시인으로 이보다 조금 후인 1140년 경 이전의 판본에 문학적 요소를 더 가미해 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성명 미상의 방랑시인들이 이 지역에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묘사의 정확성과 작품에서 사용된 언어가 당시 이슬람 세계와의 접경 지역이었던 이 지역 일대의 방언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로 기인한다.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 80여km로써 재정복된 시기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부르고스에 살던 학식 있는 작가가 단독으로 썼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오늘날 전해지는 최고(最古)의 판본은 1140년에 기록된 것을 1307년 뻬르 아밧이라는 사람이 다시 필사한 것이다. 이것을 1779년 또마스 안또니오 산체스가 처음 출판함으로써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고, 이후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다.

 

2. 시대 상황

주인공인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는 1040년경 까스띠야의 수도인 부르고스 인근에 위치해 있는 비바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도인 모로족을 상대로 한창 국토회복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점령했던 이슬람교도들은 점차 기독교도들에게 밀려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당시에는 메디나셀리 인근 지역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었다. 북부의 기독교 세계는 까스띠야-레온 왕국을 중심으로 나바라 왕국와 부속 아라곤 백작령, 프랑스인들이 세운 까딸루냐 백작령 등이 재정복전에 참가하고 있었던 반면에, 남부의 이슬람 세계는 수 십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 세력과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반도의 이슬람 세력이 점차 남쪽으로 밀리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발렌시아에서 시드가 상대했던 이슬람 세력이 바로 북아프리카에서 재차 이베리아 반도로 진격해온 알모라비데족이었던 것이다.
당시 시골 귀족 가문 출신인 로드리고는 까스띠야-레온의 통합 군주인 페르난도 1세의 궁정에서 교육받고 궁정기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죽자 왕국은 두 아들에게 분할된다. 큰 아들인 산초 2세는 까스띠야 왕국을, 작은 아들인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 사이에 영토 다툼이 벌어졌고, 1072년 산초 2세가 우라까 공주의 영지인 사모라에서 암살을 당한다. 알폰소 6세와 우라까 간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있던 까스띠야인들은 암살의 배후세력으로 알폰소 6세를 의심했으나, 구체적인 증거도 없고 그가 산초 2세의 뒤를 이어 까스띠야의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드는 귀족 대표로 나서 알폰소 6세에게 까스띠야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산초 왕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맹세해 결백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알폰소 6세는 분노와 굴욕감을 느끼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를 맹세했고, 시드를 위시한 모든 까스띠야의 귀족들은 알폰소 6세를 새로운 군주로 맞는다. 이를 계기로 시드는 알폰소 국왕의 눈 밖에 나 권력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하며,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정적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세비야의 모로 왕으로부터 공물을 거두어오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정적들이 이를 공물 착복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국왕으로부터 용서는 받았지만 의혹의 눈길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의 허락 없이 단독으로 똘레도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는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국왕의 개인적인 원한에 그 간 그에게 씌워졌던 혐의들이 한꺼번에 표출되면서 추방령에 처해지기에 이른다. 이에 시드는 가산을 정리하고 왕국을 떠날 채비를 한다. 노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3. 작품의 구성 및 가치

노래는 3부로 나뉘어 있다.
제1부는 ‘추방의 노래’로써, 1084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드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정든 집을 뒤로 하고 쓸쓸히 부르고스를 떠난다. 충성스런 부하들 몇 명만이 추방 길에 따라나선다. 주민들 모두 그를 가엽게 여기지만 칙령에 따라 물 한 모금조차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부르고스 교외에서 궁핍하게 노숙을 하고 있을 때 마르띤 안똘리네스라는 부르고스의 귀족이 먹을 것을 갖고 찾아와 대열에 합류한다. 그의 기지로 모래를 가득채운 궤짝을 금궤라고 속이고, 이를 담보로 유대인인 라껠과 비다스에게 거액을 받아내 비용에 충당한다. 시드는 부인과 두 딸을 산 뻬드로 데 까르데냐 수도원에 맡겨두고 눈물의 작별을 고한다. 냉혹한 전사답지 않게 ‘손에서 손톱이 빠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어린 두 딸을 두고 떠나는 슬픔을 삭인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왕의 보복을 무릅쓰고 시드 곁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이미 300명에 이른다. 이에 사촌 동생인 ‘미나야’ 알바르 파녜스의 충고에 따라 모로인들의 도시인 까스떼혼과 알꼬세르를 점령해 부하들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전리품을 골고루 나누어 준다. 이에 격분한 발렌시아의 왕 따민이 3천명의 군사를 몰아 공격해 오지만, 시드와 그의 부하들은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싸워 크게 이긴다. 시드는 미나야를 통해 30필의 말과 많은 전리품을 알폰소 국왕에게 보내 사죄의 뜻을 전하고, 부인과 두 딸을 데려오도록 한다. 알꼬세르 성이 병사들의 수에 비해 비좁고 수비하기가 어렵자 시드는 성을 팔고 떠난다. 이에 모로인 주민들은 모두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가 주민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재산도 함부로 빼앗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르고스에 갔던 미나야는 시드의 사면을 윤허 받지는 못했으나, 원하는 자들은 누구든 따라가도 좋다는 국왕의 허락에 따라 200명의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시드는 바르셀로나 백작의 영토를 침범해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 시드는 이 충돌을 피해보려 했지만 어쩔 수없이 엘 삐나르 데 떼바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그 결과 시드를 얕봤던 백작은 포로로 잡히고 희대의 보검인 꼴라다를 빼앗긴다. 백작은 수치심에 곡기를 끊고 죽으려 했으나, 음식을 먹으면 풀어주겠다는 시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시드는 약속대로 백작을 풀어주고 대신 많은 전리품을 갖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제2부는 ‘결혼의 노래’로써, 1085행부터 2277행까지이다. 다시 길을 떠난 시드는 모로인들의 땅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발렌시아 지방에 이르러 헤리까, 온다, 알메나라, 부리아나, 무르비에드로 등을 점령한다. 이에 각 지역의 모로인들이 두려움에 떨며 그에게 공물을 바쳐온다. 늘 그렇듯이 시드는 전리품과 공물을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준다. 발렌시아의 모로인들도 두려움에 떤다. 이미 발렌시아 왕국의 거의 모든 마을과 도시들이 그의 수중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홉 달동안의 포위 끝에 발렌시아도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약 3년간의 기나긴 고생 끝에 드디어 시드와 부하들은 그들만의 안정된 거처를 얻은 것이었다. 시드는 부하들에게 전리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며 노고를 치하한다. 이 때 헤로니모라는 학식있고 용감한 사제 한 분이 시드를 찾아온다. 시드는 기꺼이 그를 주교로 맞아 새로운 교구를 세운다. 시드는 미나야를 다시 부르고스로 보내 알폰소 왕에게 공물을 바치고, 국왕은 시드의 부인과 두 딸을 데려가도록 허락한다. 발렌시아 함락 소식을 전해들은 세비야의 왕은 3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시드를 공격해 오지만, 참패하고 만다. 이 때 시드는 명마 바비에까를 얻는다. 한편 시드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자 그의 돈에 욕심이 생긴 까리온의 공자들이 국왕에게 중매를 부탁한다. 이 때 모로코의 왕 유수프는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발렌시아에 상륙해 성을 포위한다. 이에 헤로니모 주교가 선봉에 서 용감히 싸운 덕에 적을 크게 물리친다. 5만 명 중에서 겨우 104명만이 살아 도망칠 수 있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시드는 다시 가족을 무사히 돌려보내준 답례와 충성의 표시로 말 200필을 알폰소 왕에게 바친다. 알폰소 왕은 똘레도에서 시드의 알현을 허락하고 그 간의 일을 용서한다. 또한 왕은 시드의 두 딸의 후견인이 되기로 하고 까리온의 공자들과의 혼사를 제안한다. 시드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국왕의 요청이라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시드는 까리온의 공자들을 데리고 발렌시아로 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제3부는 “꼬르뻬스 숲 속에서의 모욕”으로, 2278행부터 3730행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발렌시아에서 살게 된 까리온의 두 공자는 비겁함과 돈 욕심을 여지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 어느 날 시드가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기르던 사자가 우리에서 뛰쳐나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하들이 시드를 깨우지 않고 다시 잡아넣으려 소동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두 공자는 겁에 질려 숨어 버린다. 이로써 시드의 부하들에게 겁쟁이로 조롱을 당하게 된다. 이 때 다시 모로코의 부까르 왕이 대군을 이끌고 발렌시아를 공격해 온다. 이 전투에서 역시 공자들은 무서워 꽁무니를 빼고, 시드의 부하들이 대신 공을 세워 준다. 이로써 체면이 더 깎인 공자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앙심을 품는다. 이 전투에서 시드는 부까르 왕을 죽이고 명검 띠쏘나를 얻는다. 발렌시아에서 크게 체면이 깎인 공자들은 돈이나 챙기려는 욕심에 시드에게 두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시드는 지참금을 듬뿍 주어 보낸다. 못내 아쉽고 찜찜한 시드는 조카인 펠릭스 무뇨스를 까리온까지 배웅하도록 딸려 보낸다. 두 공자는 인적이 끊긴 깊은 꼬르뻬스 숲에 이르자 일행을 먼저 보내고 자기들만 남아 시드의 두 딸을 매질하기 시작한다. 마치 내기라도 하듯이 옷을 벗기고 서로 번갈아 가며 채찍으로 초죽음이 될 때까지 때려댄다. 그리고는 피투성이가 된 시드의 두 딸을 짐승 밥이 되도록 버려두고 희희낙락하며 떠나간다. 먼저 떠났던 펠릭스 무뇨스는 두 공자가 늦어지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일행으로부터 슬쩍 빠져 나온다. 몰래 길을 되짚어 오다가 결국 피투성이가 된 사촌 누이들이 실신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구해준다. 이 소식이 발렌시아로 전해지자 시드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두 딸의 후견인인 국왕을 통해 까리온의 공자 측에 결투를 청한다. 국왕의 명령에 의해 까리온의 평원에서 벌어진 결투 결과, 시드 측의 세 기사 뻬드로 베르무데스와 마르띤 안똘리네스, 무뇨 구스띠오스 모두 통쾌하게 승리해 복수를 하며 까리온의 공자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다. 이 때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이 청혼을 해 오자 알폰소 국왕이 허락한다. 다시 두 번째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고 시드의 두 딸은 모두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된다. 세월이 흘러 발렌시아의 영주인 ‘전사 시드’가 죽으며 노래가 끝난다.

이 작품은 이처럼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허구를 가미한 ‘연의’이다.
역사적 사실이란 먼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라는 인물이며, 이 노래에 나오는 사건들 또한 대부분 사실이다. 즉, 세비야에 파견되어 공물을 받아온 일, 국왕의 명을 어기고 단독으로 똘레도 공략전을 벌였던 일, 왕국으로부터 추방당한 일, 발렌시아를 점령한 일, 두 딸을 왕족과 결혼시킨 일 등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알폰소 국왕에 대해서는, 비록 자신을 추방해 사지(死地)로 내몬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주군이었기에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노래에 등장하는 도시와 마을들이다. 과거 시드가 걸었고 전투를 벌였던 길과 들판, 마을과 도시들은 대부분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명칭이 바뀐 것들도 있고 폐허로 변했거나 구릉으로 변한 마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노래에 등장하는 지명 그대로 현존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타임머신 없이도 중세로 시간여행을 떠나 지척에서 시드의 숨결을 느끼며 방랑시인이 되어 노래를 읊어볼 수 있는 산 체험의 현장인 것이다. 본 번역서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당 지역의 지도를 발췌 첨부해 시드가 걸었던 길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가미한 소설적 허구로는, 우선 시드의 지나친 미화를 들 수 있다. 추방된 이후 알폰소 왕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노래에서처럼 일관된 행보를 취했던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호구지책으로 때로는 사라고사의 모로 왕을 돕기도 하고 때로는 까딸루냐 백작을 위해 싸우기도 했던 것이다. 시드 부하들 역시 상당히 미화되어 그려지고 있다. 그들은 모로인들과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으며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막힌 칼 솜씨로 적들을 물리치곤 한다. 당시의 양 측 군세로 볼 때 한 전투에서 수만 명이 격돌하는 장면은 매우 과장되어 보이며, 특히 수만 명을 몰살시키는 전투 장면은 매우 소설적이다. 이는 까리온 공자 측과의 결투에서도 두드러진다. 꼴라다와 띠쏘나라는 보검의 위력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시드 측 세 기사의 창 다루는 솜씨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한 것이다. 이는 주인공이 아끼는 측근의 패배나 죽음으로 인해 청중들을 비탄에 잠기게 하기보다는 적들을 통쾌하게 쳐부수어 환호케 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방랑시인은 아쉬움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어린 두 딸과의 이별 장면이나 꼬르뻬스 숲 속에서 가해지는 모욕 장면 등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어쨌든 시드와 부하들의 솜씨는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으며, 특히 시드에 대한 칭송은 때로 지나쳐 사실성을 훼손하고 있지만, 이것이 많은 중세 유럽의 다른 서사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인공의 인간적인 살 내음까지 가리지는 못하고 있다. 다른 소설적 허구는 두 딸들의 이름과 결혼 상대자이다. 노래에서는 엘비라와 솔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각각 끄리스띠나와 마리아이다. 이들의 첫 결혼 상대자인 까리온의 공자들이나 아라곤의 왕자 역시 가공의 인물들이다. 메넨데스 삐달에 따르면, 당시에는 딸들의 나이가 너무 어려 실제로 결혼이 이루어졌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또한 실제 결혼 상대자도, 끄리스띠나는 나바라의 왕자와 결혼했지만, 마리아는 바르셀로나의 백작인 라몬 베렝게르 3세였다고 한다. 유대인인 라껠과 비다스에게 모래 궤짝을 금궤 궤짝이라고 속여 돈을 울궈내는 장면이나 발렌시아에서 시드가 키우던 사자가 우리에서 뛰쳐나와 소동을 일으키는 장면 등은 모두 허구로써 극적 흥미를 더 해주며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처럼 방랑시인들은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능수능란하게 청중들을 울리고 웃기며 스페인 최고의 서사 문학을 꽃피웠고, 스페인들이 추구해온 신앙심과 충성심, 가족애, 포용력 등을 두루 갖춘 영웅 상을 창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가족들과 헤어질 때 냉혹한 전사답지 않게 눈물까지 흘리는 인간적인 감수성, 발렌시아를 점령한 후 스스로 독립해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까스띠야의 알폰소 왕의 신하를 자처하는 변치 않는 충성심,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후덕함과 적인 모로인들까지도 용서하고 친구로 감싸 안는 그의 관대함 등은 중세를 두루 거치면서 스페인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웅의 전형으로 기려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용맹과 숭고한 덕으로 인해 모로인들이 그에게 붙여준 경칭이 바로 아랍어로 ‘주군’이라는 뜻의 ‘시드(Cid)’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베오울프』나 『롤랑의 노래』, 『지크프리트』, 『탄호이저』 등 다른 많은 중세 서사시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주인공의 전지전능함이나 장렬한 죽음으로 인한 비장함, 비극적 서사감 등은 다소 부족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신격화되어 있지 않고 인간적이면서도 고결해 그 심리적 존재감만으로도 청중들로 하여금 이민족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을 되찾고 국가 정신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던 작품이다.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와 더불어 주인공의 이러한 고결한 영웅 정신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치 않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스페인인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시드 연대기>

1040년 경: 로드리고 디아스, 부르고스 인근에 위치해 있는 비바르의 시골 귀족 가문에서 출생.

1058년: 부친 사망. 까스띠야, 레온,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통합 군주인 페르난도 1세의 궁정으로 보내져 왕자인 산초와 함께 수학.

1063년: 제 2왕자인 알폰소와 함께 아라곤에 맞서기 위해 그라우스 전투에 참전.

1065년: 페르난도 1세 사망. 장자인 산초가 까스띠야를 계승. 로드리고 디아스 궁정기사에 임명.

1067-1072년: 국왕 산초를 도와 그의 형제들인 레온의 군주 알폰소와 갈리시아의 군주 가르시아, 사모라의 영주 우라까를 공격.

1072년: 산초 사모라에서 암살당함. 까스띠야인들은 사모라의 영주인 우라까와 알폰소가 친밀한 관계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왕위 계승권자인 알폰소를 암살 공범으로 의심하여 대관식 전에 형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맹세하라고 요구함. 이때 부르고스 지방의 산타 가데아에서 맹세를 받은 사람이 바로 궁정기사였던 로드리고 디아스였다고 함.
이 때 이후 새 국왕에 의해 계속 기용되긴 했지만 2선으로 밀려남. 대신 우라까 공주와 알폰소 국왕의 측근인 까리온의 백작들이 득세하기 시작.

1074년: 왕가 혈통의 히메나 디아스와 결혼.

1075년: 오비에도로 국왕 수행. 대성당에서 유물 궤 개봉 행사에 참석.

1079년: 세비야의 모로 왕으로부터 공물을 받아오도록 파견. 이 때 공교롭게도 그라나다의 왕이 기독교도인 나헤라 백작의 도움을 받아 세비야의 왕을 공격한다. 로드리고 디아스는 세비야의 왕을 도와 까브라에서 이들을 물리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비야의 알무따미스 왕으로부터 알폰소 국왕에게 바치는 공물과는 별도로 개인적인 선물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공물의 일부를 착복했다는 모함을 받게 된다.

1081년: 로드리고 디아스 알폰소 왕과 휴전 상태에 있던 똘레도의 모로 왕국을 공격해 많은 포로를 잡아옴. 이로 인해 알폰소 왕의 진노를 사 추방령에 처해지며, 친지들과 하인들, 부하들이 따라 나선다. 이들은 호구지책으로 바르셀로나 백작을 돕기도 하고 사라고사의 모로 왕을 도와 방어전에 나서기도 한다.

1082-1085년: 사라고사의 궁정기사가 되며, 영주라는 의미의 ‘시드’라 불리기 시작.

1087년: 북아프리카에 사는 알모라비데족의 침입을 계기로 알폰소 왕과 일시 화해. 발렌시아 왕국의 많은 영토를 점령해 모두 국왕에게 바침.

1089년: 알레도 전투에서 알폰소 왕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재차 추방.
시드는 발렌시아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

1092년: 알모라비데인들 시드에게 공물을 바치던 발렌시아의 왕 알까디르를 참수. 이에 시드는 8천 명의 병사로 발렌시아 포위.

1094년: 발렌시아 함락. 시드 도시를 재정비하고 부인과 딸들을 맞이함. 이들을 나바라와 까딸루냐의 왕자들과 결혼시킴.
성명 미상의 사제 시드를 고전 영웅들과 비교하며 그의 무훈을 칭송한 『전사의 노래 Carmen Campidoctoris』를 씀.

1098년: 발렌시아의 회교사원을 개조해 성당으로 봉헌.

1099년: 시드 사망.

1102년: 알모라비데족 발렌시아 재차 포위. 히메나 알폰소 국왕에게 원군 요청. 알폰소 국왕과 함께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도시를 소각하고 퇴각.
히메나 시드의 유골을 안고 까르데냐로 낙향.

1110년: 시드의 업적을 라틴어로 기록한 연대기 『로드리고 무훈집 또는 역사 Gesta o Historia Roderici』 출간.

목차

머리말/ i

첫 번째 노래/ 추방의 노래/ 1

두 번째 노래/ 결혼의 노래/ 59

세 번째 노래/ 꼬르빼스 숲 속에서의 모욕/ 117

작품해설 시드 연대기/ 183

 

저자 정보

  • 이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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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
    •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문학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졸업 스페인어 생성음운론 전공 (언어학 석사)
      Universidad Complutense de Madrid 졸업 스페인어 역사음운론 전공 (언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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